San Diego Rockets
 
로켓츠는 Robert Breitbard가 175만 달러에 사들이면서, 1967년 샌디에고에서 창단되었다. 1967-68 시즌부터 NBA에 참가하였고, 샌디에고가 "a city of motion"라는 테마를 사용하면서, 로켓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샌디에고 스포츠 아레나를 홈구장으로 사용했고, Jack McMahon이 로켓츠의 초대 감독이었다. 1967년 로켓츠의 첫 드래프트픽으로 미래의 Hall-of Fame 감독인, Pat Riley를 지명했다. 하지만, 첫 시즌에서 무려 67패를 당하면서, 당시 최다패 기록을 세웠다.

1968년에는 볼티모어 불릿츠를 상대로 동전 던지기에서 승리,(*로터리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는 양대 리그 최하위 두팀이 동전을 던져서 1,2픽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드래프트 1번 픽을 따냈다. 휴스턴 대학 출신의 Elvin Hayes를 지명했고, Hayes는 1969년에 팀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서부 디비전의 애틀란타 호크스를 상대로한 세미 파이널에서 2승-4패로 패하였다. 1970년 드래프트에서는 로켓츠에서 도합 25시즌이나 뛰게 될, Calvin Murphy와 Rudy Tomjanovich를 지명했다.

Hall-of-Fame 감독인 Alex Hannum이 팀을 맡게되었음에도, 로켓츠는 다음 두 시즌 동안 겨우 57승-97패에 그쳤고, PO에는 나가보지도 못했다. 저조한 성적과 관중 때문에 Breitbard는 팀을 팔 곳을 찾아 나섰고, 1971년 부동산 중개업자인 Wayne Duddleston과 은행가인 Billy Goldberg가 이끄는 Texas Sports Investments에게 560만 달러를 받고 넘기면서, 팀은 휴스턴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로켓츠는 텍사스주의 첫 NBA 팀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로켓츠란 팀 이름은 무엇보다도 휴스턴과 연관성이 깊은 이름이었다.


1970s

로켓츠는 휴스턴에 아직 경기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에, 첫 두시즌 동안은 애스트로돔, 애스트로홀, 호프하인즈 파빌리온과 같은 다양한 장소에서 게임을 펼쳤다. 또한 샌안토니오, 와코, 앨버커키, 심지어 샌디에고에서 홈게임이 펼쳐졌다. 휴스턴에서 첫 시즌 동안, 평균 관중이 5천명에 못미쳤고, 와코에서 열린 한 게임에서는 겨우 759명의 관중이 입장하기도 했었다.

1971-72 시즌 시작전, Hannum 감독은 ABA의 덴버 너겟츠로 자리를 옮겼고, Tex Winter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Winter는 Hayes에 대해서 코치해본 선수들 중에서 '최악의 기본기를 가진 선수'라 평했고, Hayes에게 익숙한 공격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을 도입했다. 결국 Winter와 Hayes간의 불화로, 로켓츠에서 4시즌동안 득점 리더였던 Hayes를 볼티모어 불릿츠의 Jack Marin과 트레이드했다. Winter 역시 73 시즌 봄에 팀이 10연패를 당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고, Johnny Egan이 감독직에 올랐다.

1975-76 시즌이 시작되면서, 로켓츠는 새로운 경기장 'The Summit'으로 옮기게 되었고, 첫 시합에서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104-89로 승리했다. Egan의 지도아래,  Tomjanovich, Murphy, 그리고 Mike Newlin이 팀을 이끌며, 로켓츠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5할 승률을 넘어섰고 휴스턴으로 옮긴 이후 첫 PO 진출을 이룩했다. 로켓츠는 Walt Frazier와 Earl Monroe가 이끄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2승-1패로 승리했지만,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2승-4패로 졌다.

1976-77 시즌에는, 첫 고졸 NBA 진출 선수인 Moses Malone을 버팔로 브레이브스로부터 트레이드해왔다. 말론은 로켓츠에서 6시즌 동안 리그 리바운드 리더였고, 당시 한시즌 공격 리바운드 기록도 수립했다. 로켓츠는 프랜차이즈 베스트 기록인 49승을 달성했고, 센트럴 디비전 1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PO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워싱턴 불리츠를 상대로 승리했고 팀 역사상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르지만, 1번 시드 팀인 필라델피아 식서스에게 2승-4패로 졌다.

1977년 12월 9일, Kevin Kunnert과 레이커스의 Kermit Washington과의 싸움에 Tomjanovich가 도우려 접근하다, Washington에게 안면을 주먹으로 맞았다. 결국 Tomjanovich는 얼굴에 무수한 골절상을 입으며 5개월이나 재활에 매달렸고, 1978년 올스타 게임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부상 이후 제 기량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휴스턴은 겨우 28승에 그치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는 Malone, Murphy, Tomjanovich가 나란히 1979년 올스타 게임에 출장했고, Malone은 1979년 MVP를 수상했다. 또한 로켓츠는 Lucas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보내고 Rick Barry를 영입했다. Barry는 1978-79 시즌에 94.7%의 자유투 성공률로 NBA 최고 기록을 새웠다. 로켓츠는 47승 35패에 센트럴 디비전 2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PO 1라운드에서 애틀란타에게 패하였다. 휴스턴의 1979-80 시즌에는, Del Harris가 새감독으로 부임하였고, 로켓츠는 41승 41패를 거두며,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이어서 센트럴 디비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PO 1라운드에서 스퍼스를 상대로 2승-1패로 승리하지만,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했다.


1980s

1980-81 시즌에는 댈러스 매버릭스가 텍사스 주의 세번째 NBA 팀으로 창단되자, NBA는 동부 컨퍼런스에 속해있던 로켓츠를 서부 컨퍼런스 미드웨스트 디비전으로 보내면서 재조정했다. 이 시즌에는 40승 42패로 스퍼스에 이어서, 캔자스시티와 함께 미드웨스트 디비전 공동 2위의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휴스턴은 PO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를 상대하여 2승-1패로 업셋을 거뒀고, 곧이어 George Gervin의 스퍼스를 상대로 4승 3패로 시리즈를 따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Otis Birdsong, Scott Wedman, Phil Ford가 이끄는 캔자스시티 킹스를 상대로 4승 1패를 거두며 첫 파이널 진출을 이룩했다. 특히 NBA 역사상 5할 미만 승률의 팀이 파이널에 오른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하지만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맞아 2승 4패로 패하였다.

이 시즌에서 리그 최단신 선수였던 Murphy는 2개의 NBA 기록을 새웠다. 첫번째는 Rick Barry가 1976년에 기록한 60 연속 자유투 성공을 넘어서는, 78 연속 자유투 성공 기록이었고, 두번째도 역시 Barry가 1979년 휴스턴에서 세운 자유투 기록을 넘어서는, 95.8%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었다. 80-81 시즌의 다른 멤버들로는 Rudy Tomjanovich, Moses Malone, Robert Reid, Mike Dunleavy, Sr., Allen Leavell, Billy Paultz, Bill Willoughby, Calvin Garrett, Tom Henderson, Major Jones가 있었다.

다음 시즌, 로켓츠는 정규 시즌에서 46승 36패로 더욱 좋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PO 1라운드에서 패배하였다. 하지만 Moses Malone이 또한번의 MVP를 수상했다.

1982-83 시즌, 제한적 FA인 Malone을 식서스로 트레이드한 로켓츠는 겨우 14승 68패에 그쳤다. 이후, Bill Fitch가 새로이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83년 드래프트에서 로켓츠는 전체 1번픽으로 버지니아 대학 출신의 Ralph Sampson을 지명했다. 그 다음 시즌엔 조금 나아진 성적을 거뒀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또다시 1번픽을 차지하기 위해서 로켓츠가 시즌 막판 게임들을 고의로 패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1985년 드래프트에서부터는 로터리 시스템이 도입되기에 이르렀고, Sampson은 83-84 시즌 ROY를 수상했다.

로켓츠는 1984년 드래프트 전체 1번픽으로 휴스턴 대학 출신의 Hakeem Olajuwon을 지명했고, Olajuwon은 데뷔 시즌에 ROY 투표에서 Michael Jordan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 두명의 다이내믹한 올스타 빅맨들과 함께, 로켓츠는 1986시즌 PO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십에서 레이커스를 상대로  4승 1패로 승리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창단이후 두번째 파이널 진출이었지만, 2승 4패로 보스턴 셀틱스에게 또한번 무너지고 만다.

1987-88 시즌에, 로켓츠는 PO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Don Chaney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고, Otis Thorpe와 Vernon Maxwell이 연이어 팀에 들어오지만, 계속 PO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The 1990s

1987년과 1992년 사이, 로켓츠는 계속해서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지만, PO 2라운드를 밟아 보지도 못했다.  Rudy Tomjanovich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고, 1992-93 시즌에 로켓츠는 55승을 기록했지만,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게 패했다. 7차전까지 간 이 시리즈는 가장 치열한 시리즈중 하나로 언급되지만, 이 때가 로켓츠 챔피언십 시대의 시작이었다. 지역 스포츠 뉴스 채널들은 로켓츠가 드디어 엘리트 급 팀으로 거듭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논평했다. 특히, 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Hakeem Olajuwon과 로켓츠 팀 구단주와의 대화에서는 팀 리더십에 있어서 Olajuwon의 더욱 큰 책임이 필요하다는 말이 오갔다. 결국 넓게 본다면, 이 리더십이 로켓츠를 우승으로 이끈 것이었다.


The championship years

1993년 7월 30일, Leslie Alexander가 로켓츠를 구입하였다. Tomjanovich의 감독으로 두번째 풀 시즌인 1993-94 시즌에서 로켓츠는 NBA 기록인 개막 이후 15연승을 내달렸다. Hakeem Olajuwon이 팀을 이끄는 가운데,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챔피언십을 차지하였다. 닉스가 3승 2패로 앞섰지만, 로켓츠는 Olajuwon의 클러치 플레이 덕분에, 홈코트에서 벌어지는 남은 2게임 모두 승리를 따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6차전에서는 로켓츠가 2점 앞선 가운데 4쿼터 종료 직전, John Starks의 슛을 블락한 장면은 NBA 역사상 최고의 클러치 수비 플레이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1994-95 시즌 전반기에 로켓츠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중반 포틀랜드에게 Otis Thorpe를 내주는 대신, 휴스턴 대학 시절 Olajuwon과 같이 뛴 적이 있던 스타 가드 Clyde Drexler를 트레이드해 왔다. 휴스턴은 서부 컨퍼런스 6번 시드로 PO에 진출하지만, 1라운드에서 60승 22패의 유타 재즈를 물리치고, 또 2라운드에서는 59승 23패의 피닉스 선즈도 물리치고,(더군다나 1승 3패로 뒤지고 있다 3연승으로 물리쳤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62승 20패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마저 승리를 거둔다. 특히 샌안토니오와의 시리즈 2차전에서는, 게임 시작전 David Robinson에 대한 MVP 시상식이 있었다. 하지만,  Olajuwon은 Robinson을 41-32 득점으로 압도하며, 게임을 휘어잡았고, 결국 로켓츠 승리를 이끌었다. 로켓츠는 이 세번의 시리즈를 모두 승리하며 Shaquille O'Neal과 Anfernee "Penny" Hardaway가 이끄는, 올랜도 매직이 기다리고 있는 파이널에 올랐다. 하지만 휴스턴은 시리즈를 4-0으로 스윕하며 백투백 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6번 시드로 우승을 차지한 것은 NBA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또한 홈코트 어드밴티지 없이 3-1 시리즈를 뒤집은 것도 역대 두번째 였으며, PO에서 50+승을 거둔 4팀과 상대해서 우승을 차지한 첫번째 팀이었다.





Post-championship


1995-96 시즌에는 부상으로 신음하며, PO 1라운드에서는 레이커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만, 2라운드에서는 소닉스에게 스윕당했다. 휴스턴의 나이들어가는 로스터와 Michael Jordan의 복귀와 함께 시카고 불스의 재등장은 로켓츠로 하여금 극적인 트레이드로 이끌었다. 로켓츠는 피닉스로 Sam Cassell, Chucky Brown, Mark Bryant, Robert Horry를 보내는 대신 Charles Barkley를 받아오면서, "Big Three"를 결성했고, 이 시즌에 57승 25패, 프랜차이즈 최다 기록인 원정 27승을 거두었다. PO 1라운드에서 미네소타를 스윕했고,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시애틀도 2라운드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유타 재즈를 맞아 패하고 말았다.

1997-98 시즌 역시 부상으로 고생하며, 41승 41패 8번 시드로 겨우 PO에 턱걸이 했다. 휴스턴은 1라운드에서 다시금 유타 재즈를 맞이하여 2승 3패로 패하고 말았다. 시즌후 Drexler는 은퇴를 결정했고, 로켓츠는 빅 쓰리에서 Drexler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Scottie Pippen을 영입했다. Pippen은 여전히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줬지만,  Barkley와 Olajuwon이 주도하는 휴스턴의 공격 시스템에서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PO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에게 1승 3패로 패하였고, 여름 오프 시즌 동안  Barkley와 Pippen은 공공연히 불화를 드러내었다.

우승한 이후, 로켓츠는 계속 PG 포지션에서 약점을 보여왔다. 그러한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Brent Price와 계약했지만, 부상으로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Price, Antoine Carr, Michael Dickerson, Othella Harrington, 미래의 1라운드 픽을 밴쿠버 그리즐리스에 보내는 대신, Steve Francis와 Tony Massenburg를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두달후 로켓츠는 불만스러워하는 Pippen을 포틀랜드로 보내고  Walt Williams, Stacey Augmon, Ed Gray, Carlos Rogers, Brian Shaw, Kelvin Cato를 받아오면서, 프랜시스 트레이드때 얕아진 로스터 뎁스를 보강하는데 힘썼다.

시즌 초반 Barkley는 필라델피아와의 게임에서 왼쪽 무릎 사두근 건 파열 부상을 당했다. 이 커리어를 마감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음에도, Barkley 다운 입답을 과시했다. "I'm just what America needs - another unemployed black man." Barkley는 계속 재활을 시도하며, 결국 시즌 마지막 게임에 잠깐이나마 코트에서 모습을 보였다. Barkley와 Olajuwon의 부상으로 리빌딩을 결정한 로켓츠는 34승 48패로 PO 진출에 실패했다.


21st century

2001년, 로켓츠는 45승 37패를 거뒀지만, 여전히 PO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더 나이들고 쇠약해진 Olajuwon은 2001년에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되었고, Steve Francis 와 Cuttino Mobley에게 리더십 역할이 주어졌다. 그 다음 시즌도 라인업 대부분이 루키들과 저니맨들로 이루어진 평범한 시즌이었다. 스타 플레이어 Steve Francis는 부상으로 많은 게임을 결장했다. 거의 20년 만에 Hakeem 없이 시즌을 치룬 로켓츠는 28승 54패로 실망스런 성적을 거뒀다.

혹독한 2001-02 시즌이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로켓츠는 2002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 픽을 거머쥐면서 중국 출신의 7-6 센터, Yao Ming을 지명한 것이었다. 2002-03 시즌에 로켓츠는 큰 향상을 이루었다. Yao,Francis, Mobley 트리오가 이끄는 로켓츠는 43승-39패를 거뒀다. 한편 Tomjanovich가 암 치료를 위해서 로켓츠 감독자리에서 은퇴하였고, Jeff Van Gundy가 감독직을 대신하였다.

2003-04 정규 시즌에 45승 37패를 거두면서 로켓츠는 1999년 이후 처음으로 PO 1라운드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레이커스에게 또다시 1라운드에서 패하였다. 오프시즌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Francis, Cuttino Mobley, Kelvin Cato를 올랜도로 보내고, Tracy McGrady, Juwan Howard, Tyronn Lue, Reece Gaines를 받아오는 블럭버스터 딜을 단행했던 것이었다.





2004-05 시즌에 McGrady와 Yao는 로켓츠를 10년이내 최고의 성적으로 이끌었고, 정규시즌을 51승 31패, 서부 5위로 마쳤다. 하지만 PO 1라운드에서 텍사스 라이벌인 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3승 4패로 패하였다. 2005 오프시즌에 로켓츠는 Stromile Swift와 Derek Anderson을 영입했다. 또한 Mike James를 토론토로 보내고 Rafer Alston을 데려왔다.

2005-06 시즌은 다양한 선수들의 부상으로 신음했다. Bob Sura는 이전 여름에 무릎 수술을 받았고, McGrady는 시즌 내내 등 부상과 싸웠다. Yao Ming 역시 발가락 수술이 필요했고, 심지어 David Wesley는 시즌 말미에 코트사이드의 카메라맨 위로 떨어지며 갈비뼈 골절상을 당했다. Yao와 McGrady는 동시에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보는게 드물었고, 로켓츠는 부상으로 허우적거렸다. 비교적 선수들이 건강한 모습이었을 때는 어느정도 성공적인 모습이었지만, 시즌 말미에는 주축 선수 대부분이 로스터에 빠진 채로 게임을 치뤘고 결국 34승 48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6-2007

로켓츠는 2006 드래프트 8번 픽으로 유콘 출신의 Rudy Gay를 지명했지만, Stromile Swift와 함께 묶어서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Shane Battier를 영입했다. Dikembe Mutombo와 Juwan Howard와 같은 베테랑들의 지원아래, Tracy McGrady는 팀을 잘 이끌어나갔다. 여러 선수들의 부상에도 로켓츠는 52승 30패로 서부 컨퍼런스 5위에다 4번 시드를 거머쥐며 정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McGrady와 로켓츠는 1라운드 유타와의 7차전에서 99-103으로 패하면서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결국 2007년 5월 18일, Jeff Van Gundy 감독이 해고되었다.


2007-2008

휴스턴은 Rick Adelman을 팀의 11번째 감독으로 영입하며 2007-08 시즌을 시작했다.

6월 14일, 로켓츠는  Juwan Howard를 미네소타로 보내고 Mike James와 Justin Reed를 받아왔다.

2007 드래프트에서는 26번 픽으로 오레곤 대학 출신의 PG Aaron Brooks를 지명했고, 소닉스의 31번 픽인 퍼듀 대학 출신의 Carl Landry를 트레이드해 왔으며, 54번 픽으로 호주출신의 SG Brad Newley를 지명했다.

7월 12일, 가드 Vassilis Spanoulis와 2009 2라운드 픽을 스퍼스로 보내고 센터 Jackie Butler와 스퍼스의 2002년 2라운드픽인 Luis Scola의 지명권을 받아왔다. 딜이 완료된지 24시간이 지나, Scola는 로켓츠 구단과 다음 시즌에 뛰기로 "기본 합의"를 했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Scola는 로켓츠와 계약했다. Chuck Hayes와 함께 PF 포지션을 공유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Scola는 2006 PO 유타와의 시리즈에서 부족했던 부분인 리바운드와 인사이드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용가치가 없던 Spanoulis로 아주 싼 가격에 Scola를 영입했다. Scola는 로켓츠에게 다시 챔피언십 시대를 가져다줄 또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7월 20일, 가드 Steve Francis와 2년 계약을 했다. Francis는 PG 포지션에 많은 도움이 될거라 기대를 했지만, 로켓츠는 5명이나 되는 PG들의 출장 시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Francis는 초반에 거의 뛰질 못했고, 많은 팬들은 Francis가 Adelman 감독 아래에서 뛸 수 있을지 궁금히 여겼다. Francis의 출장 시간은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꾸준히 늘어났지만, 무릎 부상으로 결국 시즌 아웃이 되고 말았다.

3월 16일, 로켓츠는 프랜차이즈 기록이자 NBA 역대 2위 기록인 22연승을 달성했다. 특히, 연승의 마지막 10게임에는 야오가 시즌 아웃된 이후 거둔 것이라 더욱 의미가 깊었다. 3월 18일 보스턴 셀틱스에게 94-74로 패하면서 연승행진은 끝이 났다.

로켓츠는 정규 시즌을 55승 27패로 마쳤지만, PO 1라운드에서 또다시 유타 재즈를 상대하면서 2승 4패로 패하며, 2007-08 시즌을 마감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Houston_Rock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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